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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탐구생활]하느님의 그물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현실이라 부르는가

2026.07.31 21:30

마태오복음 13장 47~52절과 장자의 호접몽

대부님께서 마태오복음 13장 47~52절 말씀을 보내주셨다.

처음에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말씀을 천천히 읽다 보니 이상하게도 장자의 「호접몽」이 떠올랐다.

장자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자가 된 꿈을 꾸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

마태오복음의 하늘 나라와 호접몽은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결국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현실이라 부르는가.

하늘 나라는 온갖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에 비유하셨다.

그물은 처음부터 좋은 물고기만 골라 잡지 않는다.

좋은 물고기와 그렇지 않은 물고기를 모두 한데 모은 뒤, 마지막에 구분한다.

이 말씀을 읽으며 먼저 생각한 것은 심판의 시점이었다.

사람은 쉽게 자기 기준으로 판단한다.

나는 좋은 사람이고,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복음에서 최종적인 구분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마지막 판단은 하느님의 몫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물고기를 미리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물고기가 되어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것과 옛것을 꺼내는 집주인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 학자를, 자기 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을 꺼내는 집주인에 비유하신다.

옛것은 율법과 예언, 이미 주어진 하느님의 약속이다.

새것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늘 나라의 복음이다.

옛것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새것 안에서 완성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는 과거의 말씀을 버리는 사람도 아니고, 옛것만 붙잡는 사람도 아니다.

옛 약속을 알고,

그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이해하며,

새것과 옛것을 함께 꺼내어 전하는 사람이다.

좋은 물고기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서부터 나는 조금 다른 질문을 떠올렸다.

우리는 좋은 물고기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절제하고, 겸손하고, 선하게 살아서

마지막에는 천국에 가기를 바라는 것일까.

그런데 천국에서도 인간이 지금의 본성을 완전히 벗어나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곳 역시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하나의 세계가 아닐까.

사람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관계가 생기고,

무언가를 원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고,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 하는 욕구도 존재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욕구와 욕망은 나쁜 것일까.

욕망이 악한가, 오만이 악한가

욕구는 사람이 나아가고 싶은 방향을 보여준다.

배고픔은 음식을 찾게 하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관계를 만들게 하며,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더 나아지고 싶게 한다.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세상에 없던 것을 태어나게도 한다.

그래서 욕망 자체를 모두 악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욕망을 이루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도구로 삼고,

나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고,

짓밟고,

타인의 존엄을 희생시키기 시작할 때 욕망 뒤에는 오만이 자리 잡는다.

욕망은 방향을 가리킬 수 있다.

하지만 오만은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해 다른 사람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그렇다면 악한 것은 욕망 그 자체라기보다,

욕망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켜도 된다고 믿는 오만이 아닐까.

천국과 연옥과 지옥을 구분하는 것

내가 궁금했던 것은 단순히 “천국은 좋은 곳인가”라는 질문이 아니었다.

인간의 본성이 남아 있다면,

천국과 연옥과 지옥을 진정으로 구분하는 것은 무엇일까.

같은 인간성과 같은 욕구가 존재하더라도,

그 욕구를 다루는 방향은 다를 수 있다.

천국은 욕망이 완전히 사라진 곳이라기보다,

욕망이 사랑과 질서 안에 놓인 상태일 수 있다.

연옥은 자신의 오만과 집착을 발견하고, 그것을 벗겨내는 과정일 수 있다.

지옥은 욕망과 자아가 끝까지 자기 자신만을 향해 굳어진 상태일 수 있다.

이렇게 바라보면 천국과 연옥과 지옥의 차이는 단순히 공간의 차이만은 아니다.

한 존재가 무엇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욕망을 사랑 안에서 다루는가.

아니면 욕망을 위해 다른 존재를 희생시키는가.

그 방향이 서로 다른 세계를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호접몽이 떠올랐다

장자의 호접몽은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묻는다.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천국과 연옥과 지옥이 모두 사람이 존재하는 세계처럼 보일 수 있다면, 나 역시 묻게 된다.

지금 내가 현실이라고 믿는 이 삶은 무엇인가.

나는 지금 천국을 살아가고 있는가.

연옥을 지나고 있는가.

아니면 스스로 지옥을 만들고 있는가.

그러나 복음은 호접몽처럼 “무엇이 진짜 현실인가”라는 질문에서 끝나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그 질문을 다시 나에게 돌려준다.

현실이 무엇이든,

지금 나는 내 욕망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욕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가.

아니면 욕망과 오만에 끌려가고 있는가.

하느님의 그물 안에서

좋은 물고기는 욕망이 전혀 없는 물고기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타인을 도구화하지 않으며,

자신이 하느님의 그물 안에 있는 존재임을 잊지 않는 물고기일 것이다.

하느님의 그물 안에서 현실을 구분하는 것은 단순히 장소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어디에 있다고 믿느냐보다,

내 욕망을 어떤 방향으로 길들이며 살아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천국과 지옥은 죽은 뒤에만 만나는 장소가 아니라,

지금 나의 선택과 관계 안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나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나는 좋은 물고기라고 스스로 판결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그물 안에서

욕망을 절제하고 오만을 경계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방향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방향을 정하는 것은

매 순간의 절제와 겸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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