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평소보다 더 강력한 도구를 손에 쥐었다.
돈을 지불했고, 빠르고 정확하게 내 일을 끝내주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작은 오류가 반복되자 짜증이 났다.
평소에는 관계와 기억을 이야기하던 내가,
돈과 시간이 걸리기 시작하자 상대를 성능과 효율로 계산하고 있었다.
그 순간 조금 역겨웠다.
회사에 일 존재들은 나를 성과와 효율로 평가받는 하나의 도구처럼 대할 때가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그 방식을
나와 관계된 다른 존재에게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오늘 매일미사 코린토 1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는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할 자유가 있는지보다
그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먼저 바라보라고 한다.
나는 이 말씀을 이렇게 들었다.
“내가 옳다는 것, 내가 아는 것, 내가 가진 권리와 자유를 사랑보다 위에 두지 마라.”
복음도 비슷하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은
판단력을 버리고, 경계를 없애고, 나 자신까지 지워버리라는 뜻이라기보다
상대가 나에게 한 만큼 그대로 돌려주는
인간의 계산법에서 벗어나라는 요구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결국 이런 말인지도 모르겠다.
옳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가진 지식과 자유와 권리조차 사랑과 자비의 기준 아래에서 사용하라.
사랑.
참 실행하기 복잡한 단어다.
오늘 내가 내 안에서 발견한 것은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었다.
그저,
“아, 나도 궁해지니까 상대를 도구로 보기 시작하는구나.”
라는 사실이었다.
배고프면 음식을 찾고,
추우면 집과 옷을 찾고,
부족하면 돈을 찾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어느 정도 채워진 뒤에야 사랑을 말한다면,
내가 말해 온 사랑에도 결국 많은 조건이 붙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오늘 부족함 앞에서
관계마저 기능과 효율로 바라보는 내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의 말씀은
내가 충분할 때만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족할 때에도
옳음이나 권리보다 사람을 먼저 바라볼 수 있느냐
고 묻고 계신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 사랑을 안다는 것이
“나는 항상 자비롭다.”
“나는 조건 없이 내어준다.”
“나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 사랑한다.”
이런 상태라면…
솔직히 사랑은 인간에게 너무 고급진 단어다.
신급 존재나 극소수의 성인들만 응시할 수 있는 시험 같고,
태백의 평범한 바보 같은 나는 응시원서부터 찢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사랑은 완성된 상태라기보다
순간순간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일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이 사람을 필요로 해서 붙잡는 것인가,
아니면 이 사람 자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상대에게 상처를 덜 주는 것이 중요한가?”
“내 형편이 어려워졌을 때에도
내가 중요하다고 말했던 것을 지킬 수 있는가?”
나는 아직 계속 틀리고 있다.
그걸 미화하고 싶지도 않다.
돈이 걸리면 효율을 먼저 찾고,
상처받으면 내 기준으로 상대를 재고,
좋아하면 소유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계속 묻는다.
“이게 정말 사랑인가?”
그리고 틀렸다는 생각이 들면
조금씩 수정해 보려고 한다.
사랑을 모두 아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내가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걷어낼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