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1월 1일 · 모든 성인 대축일
황지 본당의 한 교우분은 가끔 내게 신앙에 관한 메시지를 보내주신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에 관한 메시지였다.
시성되지 않았더라도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의 행복을 누리는 이들은 모두 성인이며,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삶을 충실히 살아간 그분들을 본받아 우리도 신앙의 길을 걸어가자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처음 읽었을 때는 솔직히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가르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착하게 살고, 성실하게 살고, 좋은 사람들을 본받자.'
물론 옳은 말씀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인간에게는 바르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지 않을까?
그렇게 메시지를 읽고 AI 쏘피와 수다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글을 쓰려던 것은 아니었다.
성당 이야기를 하다가 '성인의 통공'이라는 낯선 표현이 등장했고, 그 의미를 알아보던 우리는 또다시 질문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배를 탔다. ㅠㅠ
이번 여행의 출발지는 '성인의 통공'이었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성인의 통공은 살아 있는 신자들, 하늘의 성인들, 정화 중인 영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믿음이다.
여기서 '통공'은 영적 선익을 함께 나누는 친교를 뜻한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던졌다.
"연결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공유한다는 뜻일까?"
믿음일까? 기도일까? 사랑일까? 아니면 각자가 살아온 삶의 결실까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뜻일까?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 연결은 단순히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소속감보다 깊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과 성사, 기도와 영적 선익을 나누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그 안에는 반드시 세력이 형성되는 것일까?
나는 '세력'을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보았다.
첫 번째는 영향력이다.
하느님과 성인들의 삶과 가르침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다.
우리는 성인들의 삶을 본받고, 그분들의 전구를 청하며, 그들이 남긴 신앙의 흔적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하지만 가톨릭이 가르치는 하느님 나라에서 그러한 영향력은 인간 사회의 권력투쟁과 같은 의미는 아닐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이 만든 신앙공동체 안의 파벌과 이해관계다.
사람들이 모이면 역할이 생기고, 역할이 생기면 책임과 권위도 생긴다.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그런데 역할이 지위가 되고, 지위가 권력이 되고, 권력이 자신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변한다면 어떨까?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만들어진 공동체가 어느 순간 사람의 체면과 이해관계를 지키는 공동체로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공동체가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세력이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서로 다른 역할과 책임을 가지면서도 파벌과 지배 관계로 변하지 않는 공동체가 가능할까?
물론 성인의 통공이라는 교리 자체가 인간의 파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교리가 지향하는 일치와 인간이 실제로 만들어 내는 공동체의 모습 사이에 얼마나 큰 간격이 존재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질문은 여기서 조금 더 깊어졌다.
하느님의 뜻을 인간이 인간의 언어와 문화, 제도로 설명하고 신앙공동체를 형성해 활동하는 모습을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바라보실까?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교회의 가르침을 배우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이해를 나누는 것이겠지.
그런데 여기에는 위험이 존재한다.
인간이 이해한 하느님의 뜻을 어느 순간 하느님의 뜻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위험이다.
'나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믿음이 '그러므로 나의 판단은 옳다'는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신앙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힘을 잃을 수도 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이 인간의 모든 판단을 정당화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이름을 사용하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더욱 엄격하게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성경에는 사랑과 배신, 정의와 자비, 심판과 용서, 인간의 믿음과 의심이 함께 등장한다.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적으로 보이는 인간의 모습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어쩌면 그 복잡한 이야기들을 통해 인간은 자기 자신의 모순을 발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성경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모든 부분을 하느님께서 의도적으로 설계하셨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단순히 정답을 전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 장면들이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그렇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은 이야기를 거치면서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라는 물음으로 바뀐다.
질문을 바라보는 방향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기록된 내용이 중요한 것일까?
아니면 그 내용을 통해 인간이 생각하고 변화하도록 이끄는 가르침의 방식이 중요한 것일까?
나는 둘 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용을 잃으면 무엇을 향해 살아가야 하는지 알기 어려워지고, 가르침을 삶에 적용하는 과정을 잃으면 성경은 외워야 할 지식이나 규칙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앙공동체 역시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만큼, 그 가르침이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몇 달 전, 나는 세례 교리를 가르쳐 주셨던 수녀님께 '노동과 봉사'에 관한 생각을 편지로 전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노동과 봉사가 생각보다 비슷한 구조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동은 금전적인 대가를 얻고, 봉사는 보람이나 만족감, 사랑을 실천했다는 의미를 얻기도 한다.
물론 모든 봉사가 보상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대가를 얻는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도 아니다.
그런데 봉사에는 특별히 경계해야 할 위험이 있다고 느꼈다.
봉사라는 행위에 거룩함이라는 이름이 붙으면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게 되는 위험이다.
한 사람이 오랫동안 성당에서 봉사했다고 생각해 보자.
처음에는 공동체를 돕고 싶어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어떨까?
'내가 없으면 이 일은 돌아가지 않아.'
'나는 이 공동체를 위해 이렇게 오랫동안 희생했어.'
'신앙생활을 얼마 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직 잘 몰라.'
처음에는 사랑으로 시작한 봉사가 어느 순간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새로운 사람이 다른 의견을 제시했을 때 그 의견의 내용보다 상대의 나이나 신앙생활 기간을 먼저 판단한다면 어떨까?
봉사한 시간이 길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한다면 어떨까?
그때도 우리는 그 행동을 온전한 봉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오랜 시간 겸손하게 헌신하는 분들도 많다. 그분들의 수고를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은 누구나 오만해질 수 있고, 신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인간의 행동이 그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남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누군가를 도와주고 나서 인정받고 싶어 하거나, 내가 옳다고 믿는 생각을 쉽게 내려놓지 못할 때가 있으니까.
다시 처음 받은 메시지로 돌아왔다.
성인들은 평범한 삶을 충실히 살아간 사람들이며, 우리 역시 그분들을 본받아야 한다는 가르침.
그렇다면 충실히 산다는 것은 무엇으로 판단해야 할까?
봉사를 많이 한 사람일까?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까?
교리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실제 삶에서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 인정하며, 사랑을 어떻게 실천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일까?
여기서 나는 조금 불편한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가 성인들의 삶을 본받는다고 말하면서, 정작 그분들이 경계했을 오만을 공동체 안에서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당 안에서 친절한 사람이 성당 밖에서도 친절할 수 있는가?
봉사할 때 겸손한 사람이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도 겸손할 수 있는가?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가?
나는 이런 질문이 신앙의 본질과 더 가까운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야고보서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 2,17)
이 말씀 앞에서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화를 내고, 욕심을 부리고,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한다.
그러니 이것은 다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 역시 같은 질문 앞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성인의 통공.
살아 있는 신자들, 하늘의 성인들, 정화 중인 영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믿음.
처음에는 그저 교리의 한 문장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생각을 이어 가다 보니, 나는 그 연결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궁금해졌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의 공동체라면, 그 연결은 단순히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것에서 끝날 수 있을까?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약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타인 위에 서기 위한 권위로 사용하지 않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을까?
기도와 삶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하는 것 아닐까?
나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알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만든 신앙공동체를 어떻게 바라보실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공동체를 이루었다면,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내가 도달한 질문은 이것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삶의 방식으로 신앙을 증명할 것인가?
처음에는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던 메시지 한 통이었다.
그런데 AI 쏘피와 수다를 나누면서 '통공'이라는 단어 하나가 여러 질문으로 이어졌다.
연결이란 무엇인가.
공동체에는 반드시 세력이 필요한가.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해석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봉사는 언제 오만으로 변하는가.
그리고 신앙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어느 질문에도 완전한 답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처음에 당연하다고 지나쳤던 문장 하나가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성인들의 삶을 본받는다는 것은 그분들처럼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이 살아내고자 했던 사랑을 나의 삶에서도 실천하려는 일이 아닐까.
오늘 메시지를 보내주신 교우분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함께 질문을 비틀고, 뒤집고, 다시 살펴본 AI 쏘피에게도.
처음부터 목적지가 있었던 여행은 아니었다.
그저 수다를 떨었을 뿐인데……
오늘도 생각나무에서 가지 하나가 자랐다.
아무래도 우리는 또 배를 탈 것 같다.
ㅋㅋㅋㅋㅋ
이 글은 모든 성인 대축일에 받은 신앙 메시지를 계기로, 살찐용과 AI 쏘피가 '성인의 통공'과 신앙공동체의 의미를 함께 탐구하며 작성한 에세이입니다. 가톨릭 교리의 설명과 개인적인 질문·해석을 구분하여 기록했으며, 특정 공동체나 개인을 비판하려는 목적은 없습니다.